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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의 다양성, 그리고 깊이

     글은 다양하고 깊으나, 사람은 깊거나 다양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견지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생활의 단순함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된 세계 관찰의 지점이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시각과 관점으로 대상을 관찰하면 글이 다양해지고 깊어지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글의 다양성은 자신의 기본 정서<세계에 대한 감응 방식 및 반응 양상>에 따라 제한이 있고, 글의 깊이는 직렬적인 의식 구조를 학습하지 않으면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의 다양성 : 다양한 소재의 글쓰기를 진행하는 것, 혹은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를 진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 및 글의 형식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소재의 다양함은 자신이 자주 다루는 단어들의 특성 파악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주 쓰는 소재, 장면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해당 소재, 상황을 충분히 소비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소재, 상황이 지닌 입체적인 질감에 대한 수집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주 쓰이는 소재라고 하자. 대개 같은 글, 같은 질감이 나온다는 것은 나무가 지닌 속성 중 하나를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고, 이럴 때는 나무를 분절해서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ex) 나무 – 이파리 / 가지 / 줄기 / 옹이 / 뿌리 와 같은 분절을 진행해보자. 평소에 쓰던 글이 여기서부터 중요해지는데, 해당 분절된 특성 중 무엇을 가지고 서술된 글들이었는지 되짚어 본 다음, 자신이 집중하지 않은 특성으로 나아가자. – 여기서 만약 뿌리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는 나무 뿌리에 대한 글을 써 볼 필요가 있다.

     나무라는 전체와 뿌리라는 부분은 전혀 다른 질감으로 작용한다. 당연히 도출되는 작자의 생각 또한 달라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 이 작업은 결국 뿌리의 특성, 나무의 특성을 지닌, 비슷하되 다른 물체들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을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자신이 평소에는 전혀 다루지 않았던 소재들, 장면들에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건, 상황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고, 또 적용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되도록 다양한 소재, 특성을 바탕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이에 비해 형식의 다양함은 많이 다르다. 형식은 작게 말해선 글 내부의 장치이고, 크게 보다면 글의 장르적 다양성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체계적인 학습과 습작만이 살 길이다……라고 말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근본적인 습작의 자세가 요구된다. 바로 다양한 피드백, 그리고 시도를 멈추지 않는, 헤맴의 자세이다. 형식 상의 다양함은 헤맨 만큼 가짓수가 늘어나고, 합평을 통해 타인의 글을 읽고 분석하는 시간 만큼 쥘 수 있는 패가 늘어나게 된다. 다독, 다상량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데, 작품을 읽을 때 해당 작품의 주제가 노출되는 지점 + 첫 문장의 형태 + 반전, 혹은 구조 상 특이점이 발생한 지점들을 체크하면서 읽어보자. 무척 지루한 작업이지만, 이것들을 따로 정리해놓는 시간을 가진다면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과 글을 읽는 방식이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실패한 글쓰기를 지속해야 한다. 실패한 글쓰기란, 단순히 실패가 아니라 시도의 발현이자 외연이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다음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실패지점을 분석하는 것이지, 자신이 시도한 형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개의 실패는 장치 자체에 매몰되는 바람에 정서와 형식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긋난 지점을 교정하라는 뜻이지, 형식을 시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실패가 요구된다. 그래야 해당 실패지점만큼 성공할 수 있는 형식의 가짓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정말로 중요하다. 당장의 성공적인 글 하나보다, 실패했으나 새로운 형식, 시도가 있는 글 한 편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글쓰기에서 훨씬 큰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글의 깊이 : 글의 깊이란, 결국 소재에 대한 통찰이 얼마나 잘 되어 있고, 그것이 얼마나 잘 문장화되었는지에 따라 구성되는 특성이다. 이 말은 일단 대상에 대한 관찰을 하되, 관찰에서 발현된 직관적인 특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 및 상황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원리까지 자신의 생각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진행시켜야 한다. 직렬적이면서도 다양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 입체감이 있는 정신적인 드릴을 스스로에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말만 들었을 때는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글의 깊이는 생각보다 작법적인 요소로 이루어지는 특성이다. 아예 수식화할 수도 있다.

     대상 – 관찰자 – 관찰자가 발견한 특성 – 특성이 구성되는 방식 – 방식을 느끼게 되는 관찰자 내부의 심상<혹은 삶에 대한 가치 기준, 혹은 심리적인 기준점> – 심상을 구축하는 근본 원리<관찰자와 세계 사이의 호응 방식>

     모든 글을 이러한 체계로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퇴고 단계에서는 충분히 역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의 핵심은 우리가 왜 글을 쓰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과도 닿아 있다. 글은, 예술은 <삶과 세계에 대해서> 참지 못한 사람들의 작업이다. 즉, 내가 왜 참지 못했고, 또 무엇이 결핍했고, 무엇을 바라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가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결론에 도달한다면 오히려 의심해야 한다. 쉬운 결론은 대개 나의 결론이 아니다. 사회적 학습에 의거한, 혹은 도덕률에 의거한 결론일 확률이 높다.<사고의 정지는 대개 기댈 곳이 있기 때문에 발현된다.> 따라서 나의 결론이 등장할 때까지<자신이 평소에는 하지 않는 발상, 발견 등 ‘새로운’ 의미들> 생각을 이어나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때 나열과 진행의 차이를 고민해보자. 나열은 동일한 의미들을 그저 진열하는 것이지만, 진행은 앞선 상황에 호응해서 발생한, 인과성을 지닌 상황, 의미의 연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글을 완벽하게 통제해서 쓰려는 마음을 일정 부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는 초반 전제의 몫일 뿐, 진행되는 와중에 발견되는 주제, 혹은 의미들은 철저히 글을 통해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모든 작업은 결국 글을 써야만 진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을 ‘끝까지’ 쓰는 과정을 통해 숙달될 수 있는 지점들이다. 대개 우리가 글을 쓸 때, 글을 쓰다마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로 그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까짓 글이 뭐라고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어떤 작업이든 완성되지 못하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쓴다는 것은 결국 해당 글쓰기를 통해 내가 발견한 실패, 성공, 그리고 좋은 문장을 완결한다는 뜻이고, 이것은 반드시 추후의 작업<비단 글쓰기 뿐만이 아니라, 생각을 정돈해야 하는 모든 작업을 의미한다.>에서도 자신의 의견, 혹은 생각을 정제해서 끝까지 이어나가는 습관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글을 끝까지 쓰자. 끝까지 쓴 글의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끝까지 썼다-가 중요한 것이다.

     좋은 글, 나쁜 글, 잘 쓴 글, 못 쓴 글이란 기준은 객관적인 듯 하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누구에게 좋은 글이 누군가에겐 나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을 축으로 글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고집이나 아집을 키우라는 말이 아니다. 내 안의 화자, 내 안의 세계에 대한 확고한 심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헤매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불쑥 해안가의 절벽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더 발을 딛을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구름을 뚫고 쏟아진 햇빛과 해풍을 머금은 소나무처럼 부정할 수 없는 상像을 지니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수많은 양태 중 하나라는 것을 나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다.

  • 오후 2시

    오후 2시

    해가 뜨고 있다

    저 하늘 위로

    천천히 올라가며

    그렇게 잠시

    .

    .

    .

    각주 : 이 글의 화자는 점심을 마음껏 퍼먹고 꾸벅꾸벅 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한 시선 때문에 가만히 있는 애꿎은 태양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자기가 조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는 것으로 비유하는 오만한 인간을 서술하였다.

  • 부끄럽지 않은 글

    저는 항상 바램이 하나 있는게 내가 쓴 글을 10년 후에 읽어도 부끄럽지 않고 싶습니다.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것 같은게, 방금 전에 쓴 문장을 덜 부끄럽게 하기 위해 더 세련된 어휘를 찾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는 것이 늘상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왕 그런 목표, 소망을 하는 거 요즘은 글을 매우 신중히 써 보고 있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를 지우고 쓰고를 반복하며 고생하면 결과는 실패의 연속입니다. 할 수 있는 말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밖에 없습니다. 중학교 인사도 아니고 원,,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1시간 동안 쓴 말이 그런 뻔하디 뻔한 말들 뿐이었는데 그걸 읽으며 쓰며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진리는 안 변하는구나. 내가 말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실들은 너무나 자명해서 누가 그 사실을 말하나 안 말하나 세상에 차이가 없는 사실 뿐이구나.

    그런 사실들은 말하나 마나 소용이 없는가? “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쪽팔릴 사람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나 마나 세상이 안 변한다는게 문제지만요. 부끄러움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사소한 의견도 개진 할 수 없는 것이 삶인가 하는 생각에 세상이 좀 뻔뻔해 보였습니다. 시시콜콜한 말만 하다가 잿빛이 되는 것이 인생이었던가요..

    “저항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증거다”.. 라고 하셨나. 홍원서 교수의 지도교수 중 한 분이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결국 쪽팔림을 감수하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없나 봅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감수하면서도 계속해서 그 작은 의견들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요?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다르게 느껴질 수 있고, 그 이야기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잖아요.

    또 하나는 뻔한 소리들도 그렇게 힘없는 소리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내고 열심히 해라. 포기하지 마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세상에는 뻔하디 뻔하지만 죽고 싶은 사람을 몇초, 몇분, 나아가서 몇 년은 더 살아가게 만들 수 있는 따뜻한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끄러움을 감수하며 무엇이라도 일단 씁니다.
    높은 확률로 10년 뒤의 나는 이 글을 읽고 에라이 이게 뭐니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생각 하나가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작은 불씨가 된다면,
    그 부끄러움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값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